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몽골-남송 전쟁 (문단 편집) == 오고타이의 침공(1235~1241) == [[파일:external/s-media-cache-ak0.pinimg.com/c8136394083c5915f35cb281847758ed.jpg|width=50%]] 처음엔 몽골이 [[파죽지세]] 그 자체였다. 초반 [[조우문]]이 양평관[* 삼국지에 나오는 양평관보다는 더 서남쪽에 존재했다. 송나라의 양평관은 정촉전에 나오는 관성, 즉 양안관이었다.]에서 항전하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전군이 몰살당한 뒤 이어 1235년 10월 [[청두|성도]]가 떨어지고, 다음 해 3월 [[샹양|양양]]이 함락되었으며 1237년이 되자 몽골군은 [[황강시|황주]]까지 도달하였다. 하지만 명장 [[맹공]]이 전황을 완전히 바꿨는데, 맹공은 [[징저우시|강릉]]에 대한 공격을 막아내고, 오히려 몽골군을 연전연파하면서 양양 일대를 다시 수복하고, [[기주]]를 되찾았으며, [[쓰촨성|사천]]으로 가서 [[왕세현]][* 몽골 왕고부족 출신으로, 초기에는 금의 인물][* 조우문의 군대와 맞섰는데, 조우문을 포함한 조우문의 군대가 몰살당하자 조우문을 극찬했다고 한다.]이 이끄는 몽골군을 격파하고 영토를 수복하는 등 저력을 보여준다. 한편, 몽골군의 침입으로 엄청난 수의 주민과 군인들이 중원 지역에서 남쪽으로 피난해 왔는데, 맹공은 그들을 수용하여 군대에 편재하고 둔전을 하며 단단하게 방어망을 정비했다. 그리고 양회 지역에서는 [[두고]]와 [[여문덕]], [[하귀]]와 여개가 몽골군을 격파했다. 결국 1241년 [[오고타이 칸]]이 죽자 몽골군은 후퇴했다. 참고로 당시 몽골군은 [[키예프 루스]]를 초토화시키고, 동유럽 지역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고 [[신성로마제국]]과 겨루기 일보 직전이였는데, 오고타이 칸의 죽음으로 서유럽은 살아남게 되었다.[* 당대 서유럽의 군대가 동유럽과는 질적으로나 장비로나 달랐음을 강변하며 실제 전쟁을 벌였다면 몽골제국이 서유럽에 큰 피해를 주기 힘들거라는 의견도 많지만, 동유럽이라고 서유럽과 군사적으로 완전히 다른 동네도 아니고, [[레그니차 전투]]의 사례에서처럼 서유럽과 별다를거 없이 중무장한 기사들도 많았다. 무엇보다 레그니차 전투는 서유럽에서도 소수나마 기사단을 지원군으로 보냈음에도 참패한 전투였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